안 중 근 (安重根)
안중근은 1879년 황해도 해주의
부잣집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안중근은 태어났을 때
배에 점 7개가 북두칠성 모양으로 박혀있었다고 한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 진사는
이 아이가 북두칠성의 기운에 응하여 태어난 모양이니
이름을 응칠이라 하자 라고 했다
그래서 안중근의 어렸을 때 이름은 안응칠이었다
그는 체격은 작았지만 어려서부터 야무지고 총명했다.
(안중근의 할아버지는 그가 키가 작았기 때문에
새끼손가락이라는 뜻의 소지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학문보다는 무예를 좋아하여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다
집안이 부유했던 그는 15살부터는 서양 총을 구입해
사냥을 즐겼는데 사격에도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천주교 신자였던 그는
천주교를 통해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상하이와 간도를 여행하며 넓은 세계를 보고 왔다
그 후 평양에서 조합을 경영하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1905년 남포에 돈의학교를 세웠다
나라를 구할 인재를 키우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1907년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러시아의 연해주로 떠났다
그는 떠나면서 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움직이기가 어려워서 해외로 가야겠다
나는 이제 살아 돌아올 생각이 없다
집안일을 네게 부탁하마....
무력만이 나라를 되찾는 길이라고 생각한 안중근은
연해주에서 의병이 되어 전쟁에 참가했다
이 때 김기열 등 동지 11명을 모아놓고
왼쪽 엄지부터 넷째 손가락까지를 잘라
태극기에 大韓獨立 (대한독립) 이라는 혈서를 쓰고
죽음으로 나라를 구하겠다고 맹세한 일은 유명하다.
그 해 10월 안중근은 대동공보라는 신문을 보고
이토 히로부미 (한일 합방의 주동자이자 초대 한국 통감으로
부임했던 인물로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시켰다) 가
기차를 타고 만주로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회는 왔다!
이번에 이토가 하얼빈에 오면 암살할 생각이오
좋은 생각이오!
1909년 10월 26일 아침 7시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기차가 하얼빈 역으로 들어섰다
그 때 안중근은
구경꾼 사이에 서 있으면서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열차에서 내린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군대를 향해
걸어갈 때 안중근은 권총의 방아쇠를 세 번 당겼다
세 발 다 이토를 명중시킨 안중근은
그 자리에서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체포되었다
이토가 죽었는가?
그렇다.
천주님 감사합니다
마침내 잔악하게 횡포를 부리던 그는 죽었습니다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 갇혀 조사를 받았다
그런데 그에 대한 조사 보고서가
80cm 높이에 이르렀다고 한다
조사를 담당한 일본인은 도대체 어떤 녀석이기에
이렇게 감쪽같이 암살을 한 거야 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안중근은 재판을 받으면서도 내내 의연했다
나는 대한 독립 의군 참모 중장으로
동양의 평화를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다
나의 거사는 한국 독립전쟁의 일환이기 때문에
일본 재판정에서 재판받을 이유가 없다
위기를 느낀 일본은 급히 비밀 재판으로 바꿨다
그러나 거기서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번 거사도 우리의 뜻을 발표할 기회를 얻으려는 것인데
공개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어서 나를 죽여라!
1910년 2월 14일 일본은
자국 형법을 적용시켜 안중근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안중근은 동생들과의 마지막 면회에서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나는 천국에 가서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마음과 힘을 합해
독립을 이뤄 달라고 일러다오
천국에 대한 독립의 소리가 들려오면
나는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그는 1달 후인 3월 26일 32세로
일제에 의해 사형을 당했다. 사형장에서도 그는 꿋꿋했다
나의 거사는 오로지 동양의 평화를 위한 것이니
일본 관리인 당신도 나의 뜻을 이해한다면
누구 누구를 구별할 것 없이 합심협력하여
동양의 평화를 위해 힘쓰기를 소망할 뿐이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안 의사는 이렇게 가고 말았지만
그의 강한 독립 의지는
아직도 우리 민족의 가슴에 남아있다
그를 사건 현장에서 조사했던 일본인은
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평생 가장 존경한 사람이 안중근 의사였다.
志士仁人殺身成仁 지사와 어진사람은 몸을 죽여 인을 이룩한다 현재 안의사 기념관에 사진이 전시되고 있고 광장 옥석에 조각하여 살신성인의 애국정신을 추모하고 있다 안의사는 유가사상의 4가지 덕목중 의를 가장 중시했지만 인,예,지에 관한 글도 남겼다 이는 바로 인의 성취에 대한 안의사의 심회가 담긴 글이다 國家安危勞心焦思 국가와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 보물 제1150-1호 여순법원의 당시 검찰관 야스오카 세이시로가 친절하게 대해준데 대한 보답으로 친필한 이 묵서는 이후 야스오카의 장녀 우에노도시코씨가 감추어 소장해 오던것을 동경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원장이 헌납받아 76년 2월 11일 안의사 기념관에 기증했다. 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보물 제1150-2호 안의사가 여순감옥에서 공판정을 오갈때마다 경호를 맡으면서 안의사의 사상과 인격에 감복 안의사를 스승으로 받들었던 간수 일본군 헌병 지바 도시치에게 써준것으로 전한다 見利思義見危授命 위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보물 제596-6호 정당하게 얻은 부귀가 아니면 취하지 않는다 의를 보고 행하지 않는것은 용감함이 아니다 는 뜻을 담고 있다. 日出露消兮 正合運理 日盈必○兮 不覺其兆 해가뜨면 이슬이 사라지나니 천지의 이치에 부합되도다 해가차면 반드시 기우니 그 징조를 깨닫지 못하는도다 제국주의 정략인 침략전쟁을 일삼는 일본의 패망을 예언한 말로 안의사의 동양평화사상에 연결되는 대목이다 이 글은 정-반-합으로 전개되는 변증법적 우주운행원리를 해가차고 기울어지는 것에 비유해 일본 제국주의의 종말도 오래지않아 다가올것 이라고 예언한 말이다 東洋大勢思杳玄 有志男兒豈安眠 和局未成猶慷慨 政略不改眞可憐 동양대세 생각하매 아득하고 어둡거니 뜻 있는 사나이 편한잠을 어이자리 평화시국 못이룸이 이리도 슬픈지고 정략(침략전쟁)을 고치지 않으니 참 가엽도다 보물 제596-5호 안의사의 동양평화에 관한 지론이 담긴글이다. 동양대세의 관계와 평화정략으로 동양3국이 단결해야 서세동점의 위기를 극복할수 있다는 세계관을 갖고있었다 天堂之福永遠之樂 천당의 복은 영원한 즐거움이다 이 유묵은 최서면씨가 81년 일본에서 확인 사진을 보내와 현재 안의사 사진첩에 전하고 있다 가톨릭 신앙은 안의사의 정신적 기둥이었다 아버지 태훈의 천주교 입교에 따라 가톨릭신자가 된 안의사는 19세에 토마스(도마)란 영세명을 얻는다 人無遠慮難成大業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못하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 보물 제596-8호 白日莫虛渡靑春不再來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다 앞 글귀와 마친가지로 만 3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한점 부끄럼없고 빈틈없이 살아온 안의사가 후세에게 들려준 처세 철학이다 五老奉爲筆 靑天一丈紙 三湘作硯池 寫我腹中詩 오로봉으로 붓을 삼고 푸른 하늘 한장 종이 삼아 삼상의 물로 먹을 갈아 뱃속에 담긴 시를 쓰련다 보물 제596-9호 안의사는 청소년시절 가장 즐기던 것으로 첫째 친구와 의를 맺는것이요 둘째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것이요 셋째 총으로 사냥하는것이요 넷째 날랜말을 타고 달리는것이다 라고 했듯이 의리와 호방함을 갖춘 무사적 기질의 소유자였다 百忍堂中有泰和 백번 참는 집안에 태평과 화목이 있다 보물 제596-1호 인내를 강조한말 선현들의 구전글귀로 한결같이 부지런히 일하는 세상에는 어려움이 없다 와 짝을 이루는 말이다 歲寒然後知松柏之不彫 눈보라 친 연후에야 잣나무가 이울지 않음을 안다 보물 제569-10호 달리 말하면 날씨가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개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평상시에 애국자니 충신이니 하고 떠들어대도 나라가 위험할때야 비로소 스스로 희생하는 사람을 알수 있다는 말이다 丈夫雖死心如鐵 義士臨危機似雲 장부가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은 쇠와같고 의사는 위태로움에 이를지라도 기운이 구름같도다 보물 제569-12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결연한 자세와 굳센 기개가 드러나 글이다 오른쪽 윗부분에 증맹경시라고 쓰여 있는 점으로 보아 여순감옥을 찾아온 일본인경찰관에게 써준것으로 보인다 庸工難用連抱奇材 서투른 목수는 아름드리 큰 재목을 쓰기 어렵다 보물 제569-7호 큰 인물이 아니면 뛰어난 인재를 기용하지 못한다는 말로 불의를 보면 참지못하고 구국운동에 앞장선 안의사의 지도자관이 잘 나타난 구절이라 할수 있다 金刀山刀水慘雲難息 검산과 칼끝에 처참한 구름조차 쉬기 어렵다 안의사 며느리인 정옥녀씨가 소장하고 있다가 후손이 간직하고 있다 침략전쟁을 일삼는 당시 국제정세를 풍자한 글이다 臥病人事絶 嗟君萬里行 河橋不相送 江樹遠含情 나는 병석에 누워 일지 못하고 그대는 만리 먼길을 떠나갔는가 다릿못에 같이나가 보내길업고 강언덕 나무숲에 정만 어렸네 중국 당나라 시인 송지문의 시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黃金百萬而不如一敎子 황금 백만냥도 자식 하나 가르침만 못하다 명심보감 훈자편에 나오는 황금 한 궤작이 자식에게 경서 한권 가르치는 것만 못하다 라는 내용과 같다 思君千里 以表寸誠 望眼欲穿 幸勿負情 나라를 걱정하며 천리밖에 나와 당신을 향해 바라보니 눈이 뚫어질것 같으오 나의 이 작은 정성을 바치오니 행여나 이정을 버리지 마소서 보물 제569-11호 안의사의 우국충절을 나타낸글이다 쓰러져가는 조국의 운명과 황제의 비운을 생각하면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이 한몸 바칠각오가 되있음을 시사한 비장한 글로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에서 임금에 대한 간절한 충절을 한 여인이 지아비를 사모하는 마음에 비유하면서 자신의 뜻을 표현한것과 같다 恥惡衣惡食者不足與議 궂은 옷 궂은 밥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더불어 의논할 수 없다 보물 제569-4호 가난하고 천한것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 안의사의 인생관이 반영된 말이다. 博學於文約之以禮 글공부를 널리 하고 예법으로 몸단속하라 보물 제569-13호 안의사의 수신철학이 담긴 글이다 이 유묵은 예를 강조한 유일한 글이다 이 내용은 안의사가 여순감옥에 수감되고 사흘뒤인 11월6일 미조부치 검찰관에게 제출한 한국인 안응칠 소회 에도 들어있다 喫蔬飮水藥在其中 나물 먹고 물마시니 그 속에 낙이 있네 부귀를 부러워하지 않는 탈속의 심사가 드러난 구절이다 안의사에게 부귀는 한낱 뜬구름에 불과했다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보물 제569-2호 안의사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명구로 실천운동에 참여하면서도 학문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는 경구라 할수 있다 言語無非菩薩手段擧皆虎狼 말은 보살 아닌 것이 없건마는 하는 짓은 모두가 사납고 간특하다 을사조약 정미 7조약 등 일제가 한구을 집어삼키려던 의도들은 모두 겉으로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걸고 있지만 뒤로는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위한 사전기도였던 사실을 비난한 글이다 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 해마다 계절따라 같은 꽃이 피건만 해마다 사람들은 같지 않고 변하네 보물 제569-3호 자연의 섭리는 그대로이나 세월따라 사람들은 변하고 있다는 당시의 암울한 현실을 걱정하는 구절이다 貧而無諂富而無驕 가난하되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되 교만하지 않는다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구절의 인용이다 弱肉强食風塵時代 약한자를 강한자가 잡아먹는 풍진시대다 영-미-일-로 등 당시 강국들이 약소국을 침략하는 시대상을 반영한 글이다 天與不受反受其殃耳 만일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벌을 받게 된다 폭 31.7cm 길이 135cm 보물 제 569-24호 안의사기념관에 사진본이 전시되고 있다 안의사는 이등박문이 스스로 하얼빈에 온 것을 하늘이 준 기회로 확신하고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를 감행했다 貧與賤人之所惡者也 가난하고 천한 것은 사람들이 싫어한다 폭 42cm, 길이 120cm 가량 사진본이 안의사 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다 안의사의 富貴貧賤에 대한 올바른 생활철학이 간결하게 표현된 유묵이다 論語 里仁편에 부귀는 누구나 탐내는 것이나 올바른 도리로 얻은 것이 아니면 누리지 말며 사람마다 가난과 천함은 싫어하는 바이지만 그 도로 얻음이 아니더라도 버리지 말고 감수하라 라고 한 글귀에서 인용된 것이나 간결한 재구성의 표현이 돋보인다 一勤天下無難事 부지런하면 천하에 어려운 것이 없다 안의사의 순국일인 1910년 3월 26일자 만주 일일신문에 사진본으로 보도되어 안의사 유묵으로는 최초로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원본의 전래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안의사의 성실한 인생관이 투영된 휘호이고 百忍堂中有泰和 와 짝을 이루는 글귀라고 할수 있다 人類社會 代表重任 인류사회의 대표는 책임이 무겁다 안의사기념관에 사진본이 전시되고 있다 不仁者 不可以久處約 어질지 못한 자는 궁핍한 곳에서 오래 못 견딘다 폭 40cm 길이 150cm 論語 里仁편에서 인용한 글귀이다 안의사의 어진 성품과 인내심을 엿보이게 하는 휘호로 평가된다 敏而好學 不恥下問 민첩하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 말라 폭 40cm 길이 150cm 論語 公治편에 敏而好學 不下問 是以謂之文也 라고 한 문구에서 인용하였다 尙武의 기질을 갖은 안의사지만 학문을 중시하였음을 보여주는 글귀이다 澹泊明志 寧靜致遠 담백한 밝은 뜻이 편안하고 고요하여 오래 전수된다 조선일보사 조사부에 사진본이 소장되고 있다. 유묵소재와 진부여부를 확인중이다 臨水?魚 不如退結網 물에 다달아 고기를 부러워 함은 물러가서 그물을 뜨니만 못하다 長歎一聲 先弔日本 장탄 일성으로 먼저 일본의 명망을 조상한다 일본 東京 구대만총독부 관리를 역임한 집안에 전래하는 유묵으로 근래 金光萬이 확인 국내에 사진본이 공개된 것이다 진부 여부와 전래과정들을 확인 중이다 忍 耐 보물 제569-18호 참고 견딘다는 안의사 평생의 좌우명 第 一 江 山 보물 제569-14호 삼천리 금수강산 한반도에 대한 사랑 조국애를 나타낸 글 極 樂 보물 제 호 안의사의 신앙과 종교관이 나타난 글귀이다 仁 智 堂 보물 제569-17호 어질고 지혜로와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당호 日通淸話公 (소재불명) 청나라말을 할줄 아는 일본인 통역관에게 써준 글로 오른쪽 윗부분에 증기요타선생이라고 쓰여있다 自 愛 室 스스로를 아끼라는 뜻의 이 글귀는 어느 정자나 당시 학교 연구실등에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年年點檢人間事 惟有東風不世情 해마다세상일 헤아려보니 다만 봄바람만이 세태를 따르지 않네 사람들은 모두 변하고 시국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데 자연만은 옛날 그대로의 모습임을 뜻하고 있다 孤莫孤於自恃 스스로 잘난체 하는것보다 더 외로운것은 없다 보물 제569-16호 평소 용렬함을 드러내지 않고 뛰어남을 과시하지 않은 안의사의 겸손이 잘 나타난 구절이다 |
안중근 의사의 장인掌印)과 얼굴 사진을 합성한 그림

안중군의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 서문
서문
대저 합치면 성공하고 흩어지면 패망한다는 것은
만고에 분명히 정해져 있는 이치이다.
지금 세계는 동서(東西)로 나뉘어져 있고
인종도 각각 달라 서로 경쟁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실용기계 연구에 농업이나 상업보다 더욱 열중하고 있다
그러나 새 발명인
전기포(電氣砲 : 기관총). 비행선(飛行船). 침수정(浸水艇 : 잠수함)은
모두 사람을 상하게 하고
사물(事物)을 해치는 기계이다
청년들을 훈련시켜 전쟁터로 몰아넣어 수많은
귀중한 생명들을 희생물 처럼 버려
(犧牲物 : 하늘과 땅이나
사당의 신에게 제사지낼 때 쓰는 짐승, 소, 돼지, 양 따위)
피가 냇물을 이루고 고기가 질펀히 널려짐이
날마다 그치질 않는다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한결같은 마음이거늘
밝은 세계에 이 무슨 광경이란 말인가?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면
뼈가 시리고 마음이 서늘해진다
그 근본을 따져보면
예로부터 동양민족은 다만 문학(文學)에만 힘쓰고
제 나라만 조심해 지켰을 뿐이지
도무지 한치의 유럽 땅도 침입해 뺏지 않았다는
오대주(5大洲) 위의 사람이나 짐승 초목까지
다 알고 있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런데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가까이 수백 년 이래로
도덕(道德)을 까맣게 잊고 날로 무력을 일삼으며
경쟁하는 마음을 양성해서 조금도 꺼리는 기색이 없다
그 중 러시아가 더욱 심하다
그 폭행과 잔인한 해악이 서구(西歐)나 동아(東亞)에
어느 곳이고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악이 차고 죄가 넘쳐
신(神) 과 사람이 다같이 성낸 까닭에
하늘이 한 매듭을 짓기 위해 동해 가운데
조그만 섬나라인 일본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강대국인 러시아를 만주 대륙에서
한 주먹에 때려눕히게 하였다
누가 능히 이런 일을 헤아렸겠는가.
이것은 하늘에 순응하고 땅의 배려를 얻은 것이며
사람의 정에 응하는 이치이다
당시 만일 한(韓). 청(淸) 두 나라 국민이
상하가 일치해서 전날의 원수를 갚고자 해서
일본을 배척하고 러시아를 도왔다면
큰 승리를 거둘 수 없었을 것이나
어찌 그것을 예상 할 수 있었겟는가.
그러나 한. 청 두 나라 국민은
이와 같이 행동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일본 군대를 환영하고
그들을 위해 물건을 운반하고 도로를 닦고
정탐하는 등 일의 수고로움을 잊고 힘을 기울였다
이것은 무슨 이유인가
거기에는 두 가지 큰 사유가 있었다
일본과 러시아가 개전할 때
일본천황이 선전포고하는 글에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대한독립을 공고히 한다 라는 했다
이와 같은 대의(大義)가
청천백일(靑天白日)의 빛보다 더 밝았기 대문에
한. 청 인사는 지혜로운 이나 어리석은 이를 막론하고
일치동심해서 복종했음이 그 하나이다
또한 일본과 러시아의 다툼이
황백인종(黃白人種)의 경쟁이라 할 수 있으므로
지난날의 원수졌던 심정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리고
도리어 큰 하나의 인종 사랑 무리(愛種黨)를 이루었으니
이도 또한 인정의 순리라 가히 합리적인 이유의 다른 하나이다
통쾌하도다! 장하도다!
수백 년 동안 행악하던 백인종의 선봉을 북소리
한 번에 크게 부수었다
가히 천고의 희한한 일이며 만방이 기념할 자취이다
당시 한국과 청국 두 나라의 뜻있는 이들이
기약없이 함께 기뻐해 마지않은 것은
일본의 정략(政略)이나 일 헤쳐나감이
동서양 천지가 개벽한 뒤로
가장 뛰어난 대사업이며 시원스런 일로
스스로 헤아렸기 때문이었다
슬프다!
천만 번 의외로 승리하고 개선한 후로 가장 가깝고
가장 친하며 어질고 약한 같은 인종인
한국을 억압하여 조약을 맺고
만주의 창춘(長春) 이남인 한국을
조차(祖借)를 빙자하여 점거하였다
세계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의심이 홀연히 일어나서
일본의 위대한 명성(名聲)과 정대한 공훈이
하루아침에 바뀌어 만행을 일삼는
러시아보다 더 못된 나라로 보이게 되었다
슬프다!
용과 호랑이의 위세로서
어찌 뱀이나 고양이 같은 행동을 한단 말인가
그와 같이 좋은 기회를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안타깝고 통탄할 일이로다
동양 평화와 한국 독립에 대한 문제는
이미 세계 모든 나라의 사람들 이목에 드러나
금석(金石)처럼 믿게 되었고
한. 청 두 나라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음이랴!
이와 같은 사상은 비록 천신의 능력으로도
소멸시키기 어려울 것이거늘 하물며
한두 사람의 지모(智謨)로 어찌 말살할수 있겠는가.
지금 서양 세력이 동양으로 뻗쳐오는
西勢東漸 환난을 동양 사람이 일치 단결해서
극력 방어함이 최상책이라는 것은
비록 어린 아이 일지라도 극히 아는 일이다
그런데도 무슨 이유로 일본은
이러한 순리의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같은 인종인 이웃나라를 치고 우의(友誼)를 끊어
스스로 방휼의 형세
(蚌鷸之勢 : 조개와 도요새가 서로 물고 물리며 다투는 형세
이 때 어부가 나타나면 힘 안 들이고 잡아가게 된다고
해서 어부지리[漁父之利]라는 말이 생겼다) 를 만들어
어부(漁夫)를 기다리는 듯 하는가
한 . 청 양국인의 소망은 크게 깨져 버리고 말았다
만약 일본이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이 날로 심해진다면
부득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차마 같은 인종에게 욕을 당하지 않겠다는 소리가
한. 청 두 나라 사람의 폐부(肺腑)에서 용솟음쳐서
상하 일체가 되어 스스로 백인(白人)의
앞잡이가 될것이 불을 보듯 뻔한 형세이다
그렇게 되면 동양의 수억 황인종 가운데
수많은 뜻있는 인사와 정의로운 사나이가
어찌 수수방관(袖手傍觀)하고 앉아서
동양 전체가 까맣게 타죽는 참상을
기다리기만 할 것이며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옳겠는가
그래서 동양 평화를 위한 의전(義戰)을
하얼빈에서 개전하고 담판(談判)하는 자리를
뤼쑨구(旅順口)로 정했으며
이어 동양평화 문제에 관한 의견을 제출하는 바이다.
여러분의 눈으로 깊이 살펴보아 주기 바란다
- 1910년 경술 2월 대한국인 안중근 뤼쑨 옥중에서 쓰다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우표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을 수학하고
승마·궁술·사격술을 익혀 문무(文武)를 겸했다
1895년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多默(다묵)] 라는
세례명을 받았고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산둥[山東(산동)]을 거쳐
상하이[上海(상해)]로 갔다
1906년 석탄 상점을 정리한 뒤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세웠고
이어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세웠다
1907년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이 되어
항일운동을 펴다가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북간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1908년 대한의군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군사령관 직책을
맡아 엄인섭(嚴仁燮)과 함께 의병군을 이끌고
경흥(慶興)까지 쳐들어갔으나
일본군에 패배하여 탈출한 뒤 노브키에프스크로 가서
국민회·일심회(一心會) 등을 조직하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여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훈련을 담당하였다
1909년 3월 노브키에프스크에서
김기룡(金起龍)·엄인섭·황병길(黃丙吉) 등
12명이 모여 단지회(斷指會)를 조직
안중근·엄인섭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등박문)]를
김태훈(金泰勳)은 이완용(李完用)을 암살 제거하기로
단지의 피로써 맹세하였다
같은 해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 V.N.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하여
만주(滿洲) 하얼빈[哈爾濱(합이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살해를 결의하였다
우덕순(禹德淳)·조도선(曺道先)·유동하(劉東夏)와
저격 실행책을 세우고 하얼빈역에 잠입
코코프체프와 열차회담을 마치고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러시아 검찰관 예비심문에서
거사 동기를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개인자격이 아닌
대한의군사령관으로서 처형하였다고 밝혔다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 지방법원에서
여섯 차례 재판을 받은 뒤 1910년 3월 뤼순[旅順(여순)]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많은 유필(遺筆)을 남겼으며
재감중 (동양평화론) 을 집필하였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
(重章 : 지금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원글 : yeabosio@yahoo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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