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글라스 맥아더
(Douglas MacArthur)
노병은죽지않는다 사라질뿐이다.
The old soldier does not die, he simply goes away.
맥아더는
1880. 1. 26 미국 아칸소에서 태어나
1964. 4. 5 워싱턴 D. C.에서 타계했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 남서 태평양 전역(戰域) 사령관이었고
연합군 점령기에 전후의 일본을 통치 했으며
6·25 전쟁 초기의 9개월 동안 유엔군 총 사령관직을 맡았다.
맥아더와 한국전쟁.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대담한
인천상륙작전과 9 ·28 서울 수복 작전이다.
그는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시켜
풍전등화의 대한민국을 공산 침략으로부터 구출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일생을 전쟁터에서 보내면서
지략과 대담성이 뛰어난 군인의 삶을 살아왔다.
대부분 그의 생애는 초고속 승진과 연전 연승
개선 장군의 영광과 환희로 빛나고 있다.
인격적인 면에서 맥아더는 불가사의했고 모순적이었다.
많은 사람에게 고압적이고 도도하며
이기적이고 잘난체하는 사람으로 비추어졌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
특히 그의 사령부 직원들이 보기에는
다정하며 용기있고 가식이 없으며 겸손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그가 우수한 지능과 보기 드문 통솔력을 갖추었고
의무. 명예. 조국을 위해 전력을 다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에는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동의한다.
1945년 9월2일 65세 때
도쿄만(灣) 미국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문서를 받아냈다.
맥아더는 전후 일본 점령군 최고사령관으로
6년간 일본의 전후 복구와 민주 헌정 수립을 지원했다.
전후 일본은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했고
국민들은 기아와 질병의 고통 속에서 신음했다.
전후 복구와 경제 부흥을 도와준 맥아더는
옛날 원수였던 일본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았고
많은 일본인들은 그를 왕관을 쓰지 않은 황제로 불렀다.
맥아더는 전승국 군인으로서
점령지역에서 어떤 정치를 해야 하며
이를 위해 누구와 손잡아야 하느냐에 대한 모범적 해답을 제시했다.
그는 요시다 시게루 전직 외교관 출신 정치인과 협력하여
전후 일본 부흥을 이끌어냈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 발발이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한국전쟁도 진주만 기습 공격처럼
북한 공산군에 의한 기습적 남침이었다.
맥아더는 우선 전투부대 (스미스 대대) 를
일본에서 한국 전선에 급파 했고
1950년 7월8일 유엔군 총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3만 명의 북한군 보병 부대는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남하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한국군은 그때 북한의 위장 평화 공세에 속아
북한의 선의만 믿고 준비를 게을리했다가
속절없이 당하고 만 셈이다.
북한군은 그후 낙동강 지역까지 밀고 내려와
한국의 마지막 교두보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해 9월15일 맥아더의 인천 상륙 작전이
대한민국을 구출했다.
그는 북한군 남침 직후
급거 한국 전선을 시찰하고 돌아갔다.
인천 상륙 작전 구상은 이때
맥아더의 머리를 섬광처럼 스쳐갔고
그는 이 기본 구상을 2개월 반 동안 참모들과
수십 차례 토론 끝에 마침내 실전 작전 개념으로 굳혔다.
그는 북한군이 저항 없이 남하를 계속 한다면
보급로가 감당할 수 없이 길어질 것이고
유엔군이 배후에서 공격 보급로의 허리를 끊으면
서울 이남에 있는 북한군은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천 상륙 작전은 맥아더의 이런 거친 구상이
극비리에 작전 개념으로 다듬어져
일부의 반대에도 무릅 쓰고 감행된 성공한 작전인 것이다.
인천 상륙 작전 성공은 수도 서울을 재탈환함으로써
상당한 심리적 장점도 살릴 수 있다고 믿었고
그것은 적중했다.
이 상륙 작전은 그의 충성 스러운 애국심과
최고 지휘관으로서 탁월한 지도력. 정의감. 반공정신.
동맹국에 대한 의리가 어우러져 일궈낸 찬란한 승리였다.
최종 작전안은 8월23일 도쿄 맥아더 사령부에서
로튼 콜린스 합참의장. 해군 작전처장 포레스트 셔먼 제독. 그리고 참모들과 장시간의 격론 끝에 마무리 되었다.
그는 마지막 토론에서
일부 반대하는 장성들에게 특유의 과장법을 빌려
나는 지금 찰칵 찰칵 운명의 초침 소리를 듣고 있다.
당장 행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 죽는다 라고
비장한 결론을 내렸다.
인천 상륙 작전은 시작 되었고
맥아더는 최소한의 사상자로 승리했다.
뒤이어 계속된 수도 서울 탈환 작전도 성공.
한국군은 그해 9월28일 중앙청 꼭대기에 태극기를 꽂았다.
맥아더는 이승만 대통령과 나란히 세단을 타고
총탄 구멍으로 만신창이가 된 중앙청 건물 행사장에 도착하여
서울 수복 축하 행사에 참석했다.
이자리에서 맥아더 장군은
하느님의 자비로운 섭리로…
유엔군은 대한민국 고도(古都) 서울을
공산 전제 정치로 부터 해방함으로써
서울 시민들은 불가침의 개인 자유와 존엄성을
으뜸으로 하는 생활방식을 변함없이 누릴 기회를
회복하게 되었다 라고 역설했다.
맥아더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을 향해
각하 장병들과 저는 이제 군사 작전 임무 수행을 위해
민간 행정 책임을 각하에게 넘깁니다 라고 말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장군의 손을 덥석 잡으면서
우리는 장군을 우리 민족의 구세주로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라고
감동의 고마움을 표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 38선 이북으로 진격한 국군과 유엔군이
그해 10월 완전 승리를 앞두고 돌연 중공군 개입이라는
복병을 만나게 된다.
압록강까지 쳐올라간 국군은
통일을 바로 눈앞에 두고 휴전으로 타협해야만 했다.
맥아더는 한국전 승리를 위해
중공 폭격 등 여러 가지 확전론을 제시했다가
1951년 4월11일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해임되고 말았다.
맥아더 장군은 1937년 이후 14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뉴욕 환영 퍼레이드에서
700만 군중의 열광적 환영을 받았고
상. 하원 합동회의에서는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 라는
감동적 명연설을 남겼다.
맥아더 장군의 기도문
주여!
저의 자식이 이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약할 때 자기를 잘 분별할 수 있는 힘과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을 용기를 가지고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 하지 않고 태연하며
승리에 겸손하며 온유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그를 요행과 안락의 길로 인도하지 마시고
곤란과 고통의 길에서 항거할 줄 알 게 하시고
폭풍우 속에서도 일어설 줄 알며
패한 자를 불쌍히 여길 줄 알도록 해 주소서!
그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목표는 높게 하시고
남을 다스리기 전에 자신을 다스리게 하시며
미래를 지향하는 동시에 과거를 잊지 않게 하소서!
그 위에 유머를 알게 하시어
인생을 엄숙히 살아 가면서도
삶을 즐길 줄 아는 마음과
자기 자신을 너무 드러내지 않고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소서!
그리고
참으로 위대한 것은 소박한 것에 있다는 것과
참된 힘은 너그러움에 있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그의 어버이인 저는 헛된 인생을 살지 않았노라고
나직이 속삭이게 하소서!
일본 항복조인식
1945년 일본의 공식항복조인식에서
맥아더 장군이 일본점령군 최고사령관으로서
일본의 도쿄만에 정박한 미주리함상에서 서명하고 있다.





'일반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글래디에이터 실제 무덤 발견 (0) | 2010.05.16 |
---|---|
브란젤리나 (안젤리나 졸리와 브래드 피트) 커플의 별장 (0) | 2010.05.16 |
일본 정부 독도 시마네현 편입 허구성 사실상 자인 (0) | 2010.05.15 |
만주국 [滿洲國] (0) | 2010.05.15 |
고려 말기의 삼은 (三隱)을 아시나요 ? (0) | 2010.0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