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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Audrey Hepburn Gallery



Audrey Hepburn Gallery

 

 

흔히 세기의 미녀 세기의 요정

20세기 대표 패션아이콘이자 살아있는 천사로 불리우던

숱한 수식어를 지닌 오드리 헵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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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 헵번 데뷔 전 유년시절과 소녀시절 사진

 

영화나 선행 등을 통해서만 친숙했던

오드리 헵번의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같은 인생스토리

 

 

 

원래 발레리나를 꿈꾸던 소녀

귀족 남작 집안의 피가 흐르던 여인이자

2차 세계대전으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던 인물

 

 

오드리 헵번의 아버지는 나치 신봉자로

이로 인한 갈등이 불거졌고

헵번이 6살이 되던 무렵 이별했고

그 결과 헵번은 어머니를 따라 외가가 있는

네덜란드로 건너가 유년 시절을 보냈다

 

명문 귀족 집안이었던 탓에

웅장한 남작의 저택에서 풍족하게 살았지만

곧바로 터진 2차 세계 대전은 헵번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나치를 반대했던 헵번의 외가 식구들은 일명 추축군이 네덜란드를 점령하자

나치의 마수를 피하기 위해 도피생활을 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연합군을 지지하던 헵번의 외가친척 여럿이 희생 되었으며

당시 어린 소녀였던 헵번은 도피 생활로 인해 식량이 부족해지자

썩은 감자와 풀 꽃잎 등으로 힙겹게 생명을 유지했다고 한다

 

2차 대전 독일 패전 후

나치 신봉자였던 전력이 문제가 돼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되었고

헵번 모친은 딸의 배우 생활 내내 이 문제로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헵번은 신발에

지하 운동 조직의 편지를 숨겨 전해주기도 하는 등

나름 운동가들을 도왔다는 후문이 전해지기도 한다

 

 

 

 

 

헵번은 1929년 5월 4일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 출생이다

그녀의 외할아버지는

네덜란드의 남작 출신으로 당연히 귀족가문이었고

여기서 헵번의 어머니 엘라 반 헤임스트러가 태어났다

 

엘라는 초혼에 실패한 후

벨기에로 건너갔다가 거기서 스코틀랜드 출신 실업가인

죠셉 러스턴이라는 남자를 만나게 되고

그와 재혼해 외동딸인 오드리를 낳았다

본명은 오드리 캐슬린 러스턴

 

그러다 죠셉이 당시 복잡한 유럽 정세로 인해

성과 이름을 자주 바꾸다가

먼 친척의 성인 헵번을 붙이고 나서

딸인 오드리도 자동으로 오드리 헵번 러스턴으로 개명한다

성장한 곳은 네덜란드 초반 활동 지역은 영국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던 저택은 전소 되었고

재산은 대부분 남의 손에 넘어가 집안이 크게 몰락하여

그리고 전쟁 때문에 헵번이 제대로 공부를 할수 없었기에

최종 학력은 전쟁 직전까지 다녔던 초등학교 4학년 중퇴가 전부였다

 

170을 넘어선 큰 키는 발레를 하기에도 어려운 여건으로

당장의 생활고 때문에 고민하던 차에 홀로 영국으로 날아간 헵번은

발레를 배우는 틈틈이 생계비를 벌기 위해 생활 전선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초등학교 중퇴 이력의 어린 여인이 할수 있는 일이란

당연히 많지 않아 잡지 모델, 클럽 댄서 등 각종 직업을 전전했고

그 과정에서 단역배우 일까지 하게 된다

 

말 그대로 단역배우로 헵번은

연기나 영화가 좋아서가 아닌 단지 생계 때문에 일을 한 것이며

그 때까지 헵번의 꿈은 여전히 발레리나였다

 

이 때 그녀는 무려 6편이 되는 영국 영화에서 단역을 맡았는데

단역이 늘 그렇듯 지나가는 행인 1, 2, 3 아니면 길에서 음료나 껌 신문 파는

대사 한 마디 없고 타이틀에도 실리지 않는 역할들이었다

 

 

 

 

 

그녀의 단역 생활 종지부를 찍게 된

우리는 몬테카를로에서 라는 작품으로 헵번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제목에서 알수 있듯이 몬테카를로 로케작으로 극중 헵번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로 호텔 예식장을 탈출하는 신부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무슨 천운이 그녀에게 닿으려고 했던지

이 모습을 때마침 이 호텔에 투숙 중이던

프랑스의 여류작가인 코레트 여사가 목격하게 되었다

 

코레트 여사는 때마침 자신이 낸 작품 지지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려지게 돼서 해당 작품의 여 주인공을 물색하던 중이었고

지지 역을 맡을 여배우를 구하던 찰나 헵번을 발견한 것이다

 

 

지지는 천방지축 말괄량이 여 주인공 소녀 지지가

주변의 도움을 받아 성숙한 여인으로 차츰 성장 변신해가고

남자와의 풋풋한 애정에도 눈 떠가는 과정을 명랑 터치로 묘사한 극이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발랄하고 풋풋한 헵번의 모습에 매료된 코레트 여사는

곧바로 적임자라고 판단

오드리와 미국 브로드웨이로 함께 날아간다

 

그 동안 생활고에 시달리던 20대 초반 헵번의 암울했던 인생은

대반전을 맞게 되며 오늘날의 헵번을 존재하게 만든 밑거름이 되었다

 

아직은 유명해지기 직전 무명시절 헵번의 앳된 모습을 엿볼수 있다

 

 

헵번 특유의 그 깡마른 나이 들어도 절대 살이 찌지 않는 몸매는

오랜 굶주림으로 인해 체질이 변하고 병을 얻어 그렇게 된 것이며

굶주림의 고통 경험과 함께 자신에게 극적으로 도움을 준 단체

유니세프에 감명을 받은 것이 계기가 돼 훗날 유니세프에서 일하며

아프리카 기아돕기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생애 최고의 해, 미니버 부인, 폭풍의 언덕  등으로

당대 헐리우드에서 날리던 명장 중 명장 감독이자

그 유명한 벤허 를 연출하기도 한

윌리엄 와일러 감독 은 당시 신작을 준비 중이었다

 

로마의 휴일은 로마를 배경으로 유럽을 순방 중인

어느 가상 국가의 공주와 취재 기자의 로맨스를 다룬 작품을

준비 중이었는데 이게 기획초기부터 캐스팅 때문에 말썽이 일었다

 

애초 제작사는 공주 역에 당시 할리우드 최고의 미녀로 부상하던

아역 배우 출신 리즈 테일러 를 물망에 올려 두었고 상대 기자 역에는

당대 최고의 인기 남자 배우이던 캐리 그란트 를 사실상 확정한 상태

 

이 작품은 파라마운트 사가 제작하게 되었는데

영화사 전속제가 엄격하던 시절이라

MGM 사 전속으로 발이 묶여있던 리즈를 데려오긴 어려웠고

이 과정에서 상대역 내정자 캐리 그란트마저

캐스팅 문제가 지지부진해지자 어느 새 기권을 선언한다

 

전해지는 또다른 후문이 리즈는 당시 MGM 전속도 문제였지만

때마침 닉 힐튼 과의 첫결혼이 파경을 맞은 것도

캐스팅 불발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청순하고 순결한 여주인공 공주 역에

하필 그 때 이혼한 직후의 리즈무리라고 판단해 고사했다는 설도 있다

 

여주인공 캐스팅 난항으로 골치를 썩고 있던

와일러는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지지 공연을 보러 왔다가

무대 위의  헵번 을 보고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내가 찾던 바로 그 공주다!"

 

와일러는 지지 공연이 끝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다

헵번을 데리고 로마로 날아가

상대 남자 배우로 그레고리 을 캐스팅하여 로마의 휴일 을 완성하였다

 

이 모습은 로마의 휴일 촬영 당시

그 유명한 장면 중 하나인 극 중 초반 앤공주가

연회장에 들어서는 씬을 찍기 위해 분장을 하고 있는 모습

 

이 로마 로케 촬영 종료 직후 헵번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미국으로 곧장 날아가 지지 미국 전역 순회 공연에 돌입했고

이 지역 공연이 거의 끝나갈 무렵 로마의 휴일 이 드디어 개봉됨

 

 

수상 직후 오스카 트로피를 안은 채 감격스러워 하고 있는 모습으로

우측은 수상 당시 입은 의상

 

세기의 패션 아이콘인 헵번 신화와 스타일

그리고 헵번 헤어스타일도 전 세계에 전파시킨

이 영화 한 편으로 무명의 단역배우이자 발레리나 지망생

그리고 갓 브로드웨이 신고식을 치룬 헵번은

일약 세기의 연인으로 혜성처럼 급부상했고

덤(?)으로 사실상 영화 데뷔작이나 마찬가지인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의 영광까지 안게 된다

 

사실 이 때 가장 유력한 후보는 지상에서 영원으로 에서 열연했던

데보라 카 인데 의외로 헵번이 영광을 차지했다

 

  

 

이것도 희귀한 사진인데 이듬 해 헵번은 차기작으로 출연한 사브리나 로

 2년 연속 오스카 여우주연상에 도전했고

같이 후보에 오른 갈채의 그레이스 켈리와

시상식장 무대 뒤에서 초조하게 순서를 기다리는 모습

 

비록 연속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사브리나 팬츠 등

전설의 패션을 탄생시킨 사브리나 출연 당시 극 중 초반 선보인 일명 지방시 원피스를 입은 모습

 

이 작품에서 헵번을 기용한 빌리 와일더 감독은 헵번에 대해

뾰족한 가슴을 지닌 기존 여배우들의 틀을 바꿀 획기적인 존재라고 평함

 

당시 영화계는 나이아가라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등을 통해

관능적이고 글래머러스한 이미지로 어필하던 마릴린 먼로

세기의 미녀로 부상한 리즈 테일러 처럼 육감적인 몸매와 매혹적인 분위기가

여배우 세계의 전반적 대세이던 시절인데

헵번이 이 판도를 최초로 개혁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님

 

 

1957년작 퍼니 페이스 (한국 개봉 시 제목은 파리의 연인

출연 당시 파리 로케 현장에서 촬영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

 

 

 

 

 

 

이건 사연이 좀 있는 모습인데

오드리 헵번이 동료 배우 멜 파라와 1954년 올린 첫 결혼 당시

둘은 헵번이 <사브리>나 차기작으로 선택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온디느>에 출연할 때 호흡을 맞춘 게 계기가 돼 사랑에 빠졌고

007 작전을 방불케하는 특급 비밀 작전을 통해 결혼식을 치룸

 

기자들과 사람들의 극성맞은 관심에 이골이 난 두 사람은

일단 각각 영국과 이탈리아로 떠난다

 

헵번은 영국 영화 출연 계약을 핑계로

기자들을 따돌리고 영국으로 날아갔고

파라는 이탈리아 여행을 핑계로 이탈리아로 일단 떠난 뒤

중간 지점에 해당되는 스위스에서 둘이 만나

현지 어느 소도시 한적하고 그림같은 교외에서

비밀리에 초대한 가까운 친지 몇 사람과 마을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명 속성 결혼식을 치룬다

 

이들은 부부의 연을 맺은 직후 영화 전쟁과 평화 를 통해

온디느 에 이어 두 번째 호흡을 맞췄고 몇 년 뒤 장남 을 낳았다

 

그리고 10여년 뒤 결별했는데

이 첫 결혼식에서 헵번은 스위스 풍광이 마음에 들었는지

말년을 이 곳 스위스에 정착해 허브 키우기 등

전원적인 생활을 하며 여생을 보내게 된다

 

 

이탈리아의 정신과 의사인 안드레아 도티와 치룬 두 번째 결혼식 당시

둘은 아들 루카를 낳고 살다 10여년만에 종지부를 찍음

 

이혼 사유는 안드레아 도티 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