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마라톤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 남자 마라톤 경기가 열린 1992년 8월 9일
출발선에 선 22세의 신출내기 황영조를 주목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고작 1년 전에 마라톤에 데뷔한 황영조는 아직 세계적 수준이 아니었고
올림픽 챔피언 감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황영조는 올림픽사에 남을 명승부로 몬주익의 영웅이 된다
초반부터 선두권을 달리던 황영조는 결승선을 3㎞ 정도 남긴
몬주익 언덕에서 모리시타 고이치(일본)와 양자 대결을 벌인 끝에
내리막길에서 폭발적으로 스피드를 끌어올리며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대한민국 제1호이자 유일한 육상 올림픽 금메달이었다
올림픽 메인스타디움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진 것도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당시 황영조가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달리는 차에 뛰어들어 죽고 싶었다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가 됐다

황영조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선수가 아니었다
그의 탄생 뒤에는 한국 마라톤의 유장(悠長)한 전통이 흐르고 있었다
한국 마라톤의 영광은 일제 강점기인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고 손기정 선수의 우승에서 시작됐다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출전한 망국(亡國)의 마라토너는
우승 후 조선일보와의 국제전화 인터뷰에서
네 손기정이오…하는 한마디를 전한 뒤 한참을 흐느껴 울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전 종목을 통틀어 한국인이 올림픽에서 기록한 첫 우승이었다
이후 한국 마라톤은
1947년 서윤복
1950년 함기용이 유서 깊은 보스턴 마라톤을 잇달아 정복하며
세계적 강국의 반열에 올랐다
해외 언론에서
한국선수들이 잘 달리는 것은 김치를 먹기 때문 이라는
분석 기사를 내놓던 시절이었다
황영조로부터 배턴을 이어받은 선수는 동갑내기 이봉주(39)였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낸 그는
2000년 2시간7분20초의 현 한국 최고기록을 세웠고
2001년엔 보스턴 마라톤을 정복하며
함기용 이후 51년 만에 다시 월계관을 가져왔다
육상의 황무지인 한국이지만
마라톤만큼은 세계적인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봉주의 보스턴 정복을 끝으로
한국 마라톤도 쇠락의 길을 걸었다
한국 육상계는 황영조와 이봉주의 후예를 길러내는 데 실패했다
이봉주의 한국기록은 9년째 그대로이며
권은주의 여자마라톤 기록(2시간26분12초·1997년 춘천마라톤)도
12년째 깨지지 않고 있다
이렇다 할 기대주 한명도 꼽기 어려운 현실이다
한국 마라톤의 몰락은 한국 육상의 침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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