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대한제국 최초의 애국가
(동영상 참조)
작곡자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군악대에 지휘자로
초빙된 독일인 F. 에케르트이다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4.5~1916.8.6)
광무개혁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대한제국애국가는
1902년 8월 15일 정식으로 제정·공포되었으며
1904년 5월 각 학교에 배포되어 가르쳐졌다
그 이전에 창가 형태로 불렸던
많은 애국가가 이로써 정리되었던 셈이다
1904년(광무8) 3월 13일 황성신문에 실린 가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상제(上帝)난 황제(皇帝)를 도으소서
성수무강(聖壽無疆)샤 해옥주(海屋籌)를
산(山)갓치 으소셔
위권(威權)이 환영(寰瀛)에 치샤
오천만세(敖千萬歲)에 복록(福祿)이
무궁(無窮)케 소셔
상제(上帝)난 우리 황제(皇帝)를 도으소셔
곡의내용은 임금에 대한 충성을 노래한 것으로
한글과 함께 독일어로 번역되었다
7음 음계로 작곡된 이 곡은 3/4박자
34마디로 바단조이다
이 애국가가 제정·공포된 해에
군악은 인간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큰 위력을……
이 애국가를 부름으로써 우리 군인들은……
나라에 충성심을 불러일으키리라 는
민영환(閔泳煥)의 취지문을 함께 실어 인쇄하여
우방 50여 개국에 배포했다
에케르트는 이 애국가를 지음으로써
1903년 정부로부터
대한제국 국가의 작곡과 음악교육을 위한 공로로
태극훈장을 받았다
1910년 한일합병이 되면서 대한제국 애국가는
일제에 의해 금지곡이 되었고
독립군들은 이 애국가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1945년 해방과 6.25 전쟁을 동시에 겪으며
1948년 38선을 기준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대한제국의 애국가는 또다시 버림을 받게 된다
대한제국 애국가가 채택이 안된 이유는
프란츠 에케르트가
일본국가인 기미가요도 작곡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팝페라 카스트라토 정세훈의 대한제국 애국가
대한제국 애국가는 몇 차레의 가사 변화가 있었다
그후 1910년 부터 해방전까지는 스코틀랜드 민요 곡조에
동해물과 백두산...부터 이 기상과 이 맘으로...까지의 가사를 붙인
윤치호 작사의 애국가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널리 불려졌다
그리고 현행 안익태씨의 애국가까지 전해 내려오는데
현재의 가사를 보면
하느님의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라는 구절이 나온다
상제란 하늘에 계신 가장 높으신 분
곧 하나님을 뜻하는 말로서 우리의 옛말임을 간주할때
대한제국 애국가는 안익태씨의 애국가로 이어지며
그 정신은 변하지 않았음을 알수 있다
1897년부터 1910년까지 불과 십년동안 단명했던 대한제국
그러나 대한제국의 유물과 흔적을 살필때
우리는 어쩌면 잃어버린 민족문화의 뿌리와 혼을
발견할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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