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리코 카루소
Enrico Caruso (1873 - 1921)
오페라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카루소의 이름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는 그만큼 20세기 성악의 역사에 있어서
큰 획을 그은 위대한 테너로 평가 받았다
1873년 2월 25일에 7자녀 중 세번째로 태어난 카루소는
전형적인 나폴리 슬럼가 출신이었다
아버지 마르첼리아노는 창고에서 일하는 기술자였는데
벌이의 대부분을 술로 소비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아들을 학교에 보낼 생각 따위는 전혀 안했다
카루소가 그나마 읽기와 쓰기를 익힌 것은
오로지 어머니 안나 발디니의 덕이었다
10세쯤 되는 소년이 나폴리의 어느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의 꿈은 성악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초에 만난 교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를 낙담시켰다
네게 노래는 적당하지 않아
마치 덧문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은 목소리야....
그러나 가난한 농촌 부인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그를 끌어안고 온화하고 애정 어린 말로 격려 했다
너는 꼭 훌륭한 성악가가 될거야
엄마는 확실히 알 수 있어
그 증거로 내 노래는 점점 좋아지고 있잖니?
그녀는 얼굴이 새까맣게 타도록 열심히 일을 해서
아들에게 음악공부를 시켜 주었다
그 어머니의 칭찬과 격려가 소년의 생애를 변화시켰다
이렇게 카루소에게 용기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어머니 안나 발디니는 카루소가 15세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는 잽싸게 재혼했으며
어쩌면 카루소에겐 다행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자기가 하고 싶은 음악에 매달릴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10세가 되면서부터 카루소는 공장에 나가 밥벌이를 해야 했다
저녁시간을 틈타 학교에 나가게 되었는데
이 학교의 브론제티 신부는
카루소의 목소리가 쓸 만하다고 생각해 그에게 노래를 가르쳤다
그러나 그의 아름다운 보이 소프라노 목소리는
상류층의 연회나 결혼식 축가로 쓰였고
그 돈은 모두 브론제티에게로 돌아갔다
카루소는 우연찮은 경로를 거쳐
당시 이탈리아에서 꽤 명성높던 베르지네 선생을 소개받았다
베르지네는 이 소년의 재능을 재빨리 간파했다
그러나 그는 이 소년의 재능을 키워주기보다는
그의 능력을 이용해 수익을 챙기기로 마음먹었다
카루소를 꼬드겨 앞으로 4년 동안 가르치되
이후 그가 본격적으로 노래하게 되면
5년 동안의 수익금 중 25%를 갖는다는 계약을 체결했다
베르지네는 카루소가 유명해지자 수시로 찾아와 돈을 가져갔는데
이 샤일록 같은 선생의 주장은
노래를 부르는 시간만으로 5년 이라는 것이었다
평생 동안 노래해도 계약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이 문제는 결국 법정에까지 이르고 말았는데
베르지네가 20만 리라의 벌금을 토해내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베르지네는 자신이 가르쳐야 할
4년이란 기간에 대해서도 계산하고 있었다
카루소를 3년 동안 군에 보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군에 입대한 카루소는 참호 속에서도 맨날 노래만 부르고 있다가
요행히 날리아티라는 오페라에 미쳐 있는 장교의 눈에 띄게 되었고
결국 동생을 대신 복무시키는 조건으로 조기 제대하게 되었다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는
이탈리아적 특성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카루소는 1895년 5월 15일 나폴리의 테아트로 누오보에서
모렐리의 오페라 아미코 프란체스코 로
데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데뷔 이전에 카루소는
몇 번의 시도와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1894년 그의 나이 21세 때 베르지네 선생은
하루 빨리 카루소를 무대에 세워 돈을 벌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친구이자 메르카단테 극장의 매니저인 다스푸로에게 부탁했다
다스푸로는 카루소에게 미뇽의 빌헬름 마이스터 역을 맡겼다
그러나 보통 음악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채로
처음 무대에 오른 카루소는 대사도 까먹고
시작도 놓치고 목소리마저도 갈라지는 끔찍한 경험을 해야만 했다
결국 카루소의 출연은 취소되었다
좌절한 카루소는 다시 성당의 솔로이스트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카세라타 성당의 한 연주자가 카루소의 재능을 파악하고
그의 친구인 모렐리에게 추천했다
그것이 결국 카루소의 데뷔 무대가 되었다
카루소가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투리두 역을 맡게 되면서부터다
이 공연의 성공으로
그는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마농 레스코 등의
오페라에 출연하게 되었다
카루소의 목소리는 고음부에서 곧잘 갈라지는 불안한 리리코였다
카루소의 비약은 빈센초 롬바르디라는 지휘자를 만나게 되면서부터 시작됐다
롬바르디는 푸치니 레온카발로 마스카니 조르다노 등의
이른바 베리스모 라는
이탈리아 사실주의 오페라 사조를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카루소의 목소리에서 베리스모 테너의 이상향을 발견
그를 키우기 시작했다
1897년이 되자 그의 목소리는 확연히 달라졌다
그가 푸치니의 새로운 오페라 라 보엠을 공연할 당시
푸치니는 친히 이 젊은 테너를 방문했다
자신의 반주로 노래를 부르게 한 후
그는 무릎을 치면서 말했다
대체 누가 당신을 내게 보낸건가?
신인가?..
이 시기에 뒤늦게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한 카루소가
사랑을 만난 것은 자신의 음악 인생 전환점에 섰을 때였으며
그 대상은 오페라 라 보엠의 작품 속 상대역이었다
카루소는 로돌프 역을 맡았고
아다 지아케티는 그 상대인 미미로 나섰다
1897년 당시 카루소의 나이는 24세였고
지아케티는 연상의 유부녀 였다
카루소가 명성을 막 획득하기 시작할 무렵 만난 그녀가
그때는 그에게 맞는 이상적인 여인이었다
지적이고 강한 의지를 가진 지아케티는 정열적인 여성이었고
음악에 있어서도 그간 쌓아온 그녀의 지혜와 겸험은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채 큰 무대에 선 젊은 테너에게 큰 도움이 됐다
그녀는 카루소의 목소리 계발과 연기까지 코치해줬다
한창 지원과 힘이 필요했던 그에게 그녀의 헌신은 그에게 힘과 용기가 됐다
만난 이듬해 첫아들 로돌포가 태어났고
곧이어 둘째 아들 엔리코도 세상의 빛을 봤다
하지만 늘 순회공연을 다녀하는 카루소 때문에
가족이 함께 있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가족에 대한 애착도 강했지만
자신의 이력에 대한 집념도 강했던 아다였기에
이런 생활을 견뎌내긴 쉽지 않았다
그녀는 지쳐갔고
늘 공연을 다니느라 바쁜 카루소보다 훨씬 빨리 마음을 접어버렸다
1908년 카루소가 미국 순회공연을 마친 후
가족들과 함께 할 긴 휴가를 기대하면서 돌아왔을 때
이미 그가 사랑한 사람은 그를 떠난 후였다
아다가 운전사와 집을 나가버린 것이다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그였지만 사랑은 이미 그를 저버렸다
무대 위에서 훨씬 많은 사람들에게 박수와 환호를 받은 카루소는
정작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하나의 사랑은 끝내 지키지 못했다
한편 카루소는 칠레아의 아를르의 연인 초연
조르다노의 페도라 초연이 계속 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1898년에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공연을 가졌다
이때 그와 함께 무대에 섰던 루이자 테트라치니는
당시의 경험을 이렇게 말했다
20대의 그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때 카루소는 일반적인 G나 A음을 내는데도 어려움을 느껴야 했습니다
이러다간 바리톤으로 내려가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죠
그러나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라 보엠을 공연하면서 들은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탁월하게 변해 있었어요
풍부하고 둥글고 열려 있는 나폴리탄 목소리 바로 그것이었어요
카루소는 데뷔한 지 5년 만에
오페라의 성역 이라 불리는 라 스칼라에 입성했다
당시 지휘를 맡은 사람이 토스카니니였다
유럽 무대가 아니라 미국 메트로폴리탄 무대였다
1903년 11월 23일
리골레토’로 메트로폴리탄에 나타난 이후
단 한 번의 양보 외엔 줄곧 시즌 첫 공연의 주역을 차지했다
바그너의 오페라물들을 제외한다면
그의 목소리가 뻗치지 않은 오페라가 없었다
카루소의 음악적 능력은 또 어떠했는가?
소프라노 제럴딘 파라는 카루소와
라 보엠을 녹음할 때의 상황을 얘기한 적이 있다
그의 노래에 극장도 연기도 모든 것들도 다 잊어버렸다
나는 결국 어린이처럼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며
내 차례가 돌아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케스트라는 당황했고 마침내 프롬프터가 다가와 내게 속삭였다
자 미스 파라 노래 할 거요 말거요...
무려 14개의 방으로 꾸며져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당시 카루소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더글라스의 표현에 따르면
뉴욕 시장이나 야구선수보다도 더 유명한 인물이 카루소였다
그가 공연장에 들어설 땐
반주자 비서 회계사 운전사 의상담당 등이 줄지어 따라 들어왔다
참고로 그는 1918년 한해 동안
당시 금액으로 15만 4천 달러의 세금을 냈다
그러나 정점이라는 것은 항상 하강을 내포한다
말년의 카루소는 너무나 유명해졌기 때문에
그 유명세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비평가들은 이 유명한 인물의 흠을 잡아내려고 혈안이었고
블랙 핸드 라는 갱단은 테러를 하겠다는 협박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의 공연 티켓 가격이 높아진 만큼 공연은 더욱 부담스러웠다
그는 개런티에 맞먹는 노래를 부르려 항상 노력해야 했다
한번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오스카 헤머스타인이
그에게 계약 서류를 내놓으면서
개런티를 스스로 써넣으라 청했다
이른바 백지수표인 셈이었다
유감스럽게 당신의 가치만큼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원하시는 만큼은 드리고자 합니다
카루소가 서류에 액수를 기입하자
헤머스타인이 당장 이를 두 배로 고쳐 썼다
그러자 카루소가 정색을 했다
아니오, 그건 절대로 안돼요
그러면 노래부를 때 너무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안돼요.
말년에 그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식의 자조적인 내용이 씌어 있었다
오늘 나는 마르타 라는 전쟁에서 다시 이겼다오
모든 카루소의 공연은 센세이셔널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모든 것에 너무 지쳤소
세상 밖 어딘가에서 사람들도 나를 잊고
나도 사람들을 잊은 채 살고 싶소...
더 이상 광대이기를 포기한 광대는 어떻게 되는가?
결국 1920년 크리스마스 이브 공연을 끝으로
그는 무대에서 은퇴했다
유태인의 엘레아자르 역이었다
그러나 그의 은퇴는 너무 늦었다
이미 늑막염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있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여름 나폴리로 돌아간
그는 결혼 한 지 3년 은퇴한 지는 1년도 못 되어
생존시에 그를 외면했던 고향 나폴리에서
1921년 8월 2일 오후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48세의 아까운 나이었다
나폴리 시가를 행진한 후 그곳에 묻혔다
성악계에선 흔히 천재적인 신진 성악가가 나타났을 때
카루소의 재래 라는 식의 표현을 쓰곤 했다
그만큼 카루소의 이름은 성악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카루소가 그만한 명성을 얻기까지는
시대적 상황과 행운과 선천적 자질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엄청난 노력이 뒤따랐다
만약 내가 카루소 같은 환경에서 태어났더라면
내겐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알 수 없다
나는 카루소처럼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고
만나는 모든 곳에 따스함을 선사할 자신이 없다
카루소가 오페라 역사에 획을 그은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시대적 상황이 카루소를 요구했다
1890년 마스카니가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라는 오페라로
베리스모 선풍을 몰고 왔다.
이어 레온카발로가 팔리아치 를 무대에 올림으로써
이탈리아 오페라는 이전의 장식적이고 서정적인 목소리보다는
짙은 열정을 가진 채
오케스트라와 맞붙을수 있는 목소리를 원하게 되었다
당대의 성악가들이 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허둥대는 가운데
딱히 들어맞는 목소리가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카루소였다
또 하나의 외적 이유는 레코드라는 기술적 혁명 때문이었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집안에 앉아 오페라를 들을수 있게 된
그 첫 장식이 카루소였기 때문이다
레코드 기술의 발전과 카루소의 발전이
비슷한 속도로 같이 진행되었다는 것 또한
끊임없이 카루소를 주목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외적인 행운에 힘입어 카루소는
그때까지 알려진 대부분의 오페라와 이탈리아 민요들을
소화해내는 저력을 과시했다
나이젤 더글라스는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 중에 나오는
남몰래 흘리는 눈물의 마지막 부분을 예로 들면서
오페라 레코드 역사의 위대한 순간 이라고 표현했다
팔리아치의 의상을 입어라
아이다의 청아한 아이다
조콘다의 하늘과 바다
마르타의 꿈과 같이 등 갖가지 아리아와
불꺼진 창 같은 이탈리아 민요들이
그에 의해 명곡으로 빛을 발했다
곡과 상대에 따라 천변만화하는 자질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소프라노든 베이스든 상대가 그 누구든
카루소와의 듀엣은 항상 아름다웠다
카루소에게는 상대에 따라
음의 성격을 조절하는 카멜레온 같은 능력이 있었고
이로 인해 그의 음반은 더욱 오래 살아남게 되었다
나이젤 더글라스는 카루소야 말로
인간 정신의 승리를 보여준 인물 이라고 말하면서
그의 가장 매혹적인 점은
그 스스로에게 웃음을 보낼 줄 알았다는 것이다 라고 부연했다
카루소는 스스로를 희화화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이 점이 그를 영원한 광대로 만들었다
그는 캐리커처를 그리는 능력이 탁월했다
공연 때는 무대 뒤에 앉아
자신을 포함한 가수들의 우스꽝스런 모습을 그렸으며
그 그림들을 선물로 주곤 했다
그는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캐리커처에도 바나나처럼 큰 입만 강조해서 그렸다
그의 아내가 딸을 임신했을 때 그는 이렇게 편지를 썼다
애가 당신을 닮았으면 좋겠소
왜냐하면 나는 너무 못생겼거든...

많은 전기작가들이
카루소가 성공한 이유 중의 하나로
낙천적이고도 따뜻한 그의 성격에 대해 얘기했다
자주 실패하기도 했지만
항상 툴툴 털고 다시 일어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코벤트 가든의 수석지휘자였던 퍼시 피트는 이렇게 회상했다
카루소는 믿음직한 아티스트였을 뿐 아니라
어느 장소에서도 좌중을 즐겁게 만드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와의 저녁파티는 모든 관계자들이 꼬여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코벤트 가든을 떠나 버리자
우리의 모임도 곧 시들해져 버리고 말았다
카루소 없는 파티란 건 존재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성격 때문에 카루소는 자주 곤경을 자처했다
그는 결혼 전에 이미 유부녀인 소프라노와 동거한 적이 있었다
둘이 헤어지고 난 후 카루소의 명성이 치솟게 되
이 여인은 카루소가 보냈던
연애편지들을 공개하면서 까지 법정 소송을 벌인 바 있다
또한 뉴욕 센트럴파크 동물원에 근무하는
한 아일랜드계 여인에게 음란한 짓을 했다는 이유로
벌금형을 받은 적도 있다
이른바 원숭이 우리 사건 이라는 제목으로 떠들썩했던
이 일은 일파만파로 커져 결국 뉴욕에 거주하는
아일랜드계와 이탈리아계 이민들의 분쟁으로까지 치닫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넘어 그는 타고난 광대 였다
노래로 인해 웃고
노래로 인해 울며
노래로 인해 사랑에 빠지고
노래로 인해 죽었다.
카루소가 생전에 레코딩으로 번 돈은 약 2백만 달러 정도였고
그라모폰사는 그 2배 정도 벌었다
그러나 카루소가 죽고 난 지 80여년이 더 지난 지금에도
음반사는 계속해서 카루소로 돈을 벌고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8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의 목소리는 벨칸토의 규범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리리코 스핀토로서의 극적인 힘과 풍성한 표현력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와 정확한 기교
뛰어난 연기력은
그를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추앙받고
후배 성악가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위대한 성악가로서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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