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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페루치오 탈리아비니 - 리릭 테너

 


 

페루치오 탈리아비니
Ferrucio Tagliavini


테너 가수 기근 이라는 소리를
이곳 저곳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있는 오늘날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이른바 Three Tenors
여전히 세계적인 지명도를 누리고 있는 현실에 대해
은근히 개탄하는 보수적인 애호가분들이 많습니다

Three Tenors 중에서
파바로티는 이미 고인이 되었고
카레라스는 백혈병으로 이미 목소리에 손상을 입었고
도밍고만이 활동을 하고 있다
그다음 보첼리가 활약을 하고 있다

추억의 명테너들 가운데 이탈리아의 리릭 테너
페루치오 탈리아비니(Ferruccio Tagliavini, 1913~1995) 가 있다

비길 바 없이 섬세하고 달콤한 아름다움을 지닌
절묘하게 탐미적인 미성(美聲)으로 일세를 풍미한
페루치오 탈리아비니
1913년 8월 14일 이탈리아의 레지오 에밀리아(Reggio Emilia) 근교의
작은 마을 바르코(Barco) 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마을 성당의 성가대 단원으로 활동하며
주일 미사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이미 당시부터 마을 사람들이 그를 작은 카루소 라는
애칭으로 부를 정도로 특출하게 아름다운 목소리를 인정받았다

바이올린도 꽤 훌륭한 연주 솜씨를 자랑하며
일찌감치 타고난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성악가로서의 재능을 타고 났음을 확신한 탈리아비니의 부친은
아들에게 성악 레슨을 받게 했으나
소년 탈리아비니는 전기 기술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아버지의 희망을 완전히 저버리기 어려워
한동안은 파르마 음악에서 베이스 가수였던
성악 교사 이탈로 브랑쿠치(Italo Brancucci)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악 공부를 했다

브랑쿠치 선생은 그의 특출한 재능을 확신하여
장학금을 받도록 해으나 성악가로서의 미래에 확신을 못한
탈리아비니는 결국 음악원을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전기공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탈리아비니가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한후
1938년 5월의 어느 날 피렌체에서 유명한
피렌체 5월 음악제 (Maggio Musicale Fiorentino)에 참가하여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고
이를 계기로 그는 비로소 성악가의 길을 걸어갈 것을 결심했다

콩쿠르 우승 직후 피렌체에서 약 6개월간
유명한 테너 가수 아마데오 바시(Amadeo Bassi)의 지도를 받으며
기본적인 훈련을 마친 탈리아비니
1938년 10월 26일 약관 25세의 젊은 나이에
이탈리아에서도 손꼽는 명문 극장인
피렌체 시립 오페라극장 (Teatro Communale di Firenze) 무대에서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 공연에서 로돌포 역을 노래하며
오페라 무대에 데뷔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탈리아비니피렌체에서

로시니의 세미라미데 (이드레노 역)
세비야의 이발사 (알마비바 백작 역)
모짜르트의 마술 피리 (타미노 역)
글룩의 아르미다 등의 오페라에 출연하며
이탈리아 오페라계에서
새로운 리릭 테너로서의 명성을 구축해나갔다

데뷔 이듬해인 1939년
탈리아비니로마 오페라극장 무대에 올려진
마스카니의  친구 프리츠  공연에서
타이틀 롤인 프리츠 역을 노래하여 로마 무대에 데뷔하였다

당시의 공연은 작곡자인 마스카니가 직접 지휘하였으며
마스카니는 공연 후 탈리아비니야말로
프리츠 역에 가장 완벽하게 어울리는 이상적인 테너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함께 연습중인 탈리아비니와 타시나리 부부

1941년 탈리아비니는 당시 한창 활발하게 활동중이던
리릭 소프라노 피아 타시나리(Pia Tassinari)를 만나
타시나리탈리아비니보다 무려 10년이나 연상이었음에도
(타시나리는 1903년생)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되어
결국 그 해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가 되었다

이듬해인 1942년 1월
탈리아비니는 마침내 29세의 나이에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의 네모리노 역으로
문턱이 한없이 높은 극장인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당인
밀라노 라 스칼라 오페라극장(Teatro alla Scala di Milano)
무대에 데뷔하여 까탈스러운 라 스칼라 의 청중을 열광시키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2차 세계대전 종료 직후
이탈리아 오페라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테너 가수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1946년 아내 타시나리와 함께
처음으로 이탈리아 밖의 오페라 무대에 서게 되는데
남반구의 라 스칼라 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콜론 오페라극장(Teatro Colon de Buenos Aires)에 출연하여
그 아름다운 목소리와 섬세한 해석으로 절찬을 받았다
(당시 남미 주요 국가들의 오페라 무대
 특히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콜론 오페라극장
 북미의 오페라 무대에 못지 않는 예술적 수준을 인정받고 있었다)

아르헨티나에서의 성공 이후
브라질과 멕시코의 오페라 무대에서도 연이은 성공을 계속하고
남미를 벗어나 북미의 오페라 무대로 진출 했다

1946년 10월 라 보엠의 로돌포 역으로
시카고 리릭 오페라극장(Chicago Lyric Opera House) 무대에 데뷔
대성공을 거두었다

시카고에서의 성공은 세계 5대 오페라극장의 하나로 자부하는
비(非)유럽권 제일의 명문 극장인
뉴욕 메트로폴리탄 (Metropolitan Opera House of New York)
관계자들의 귀에 들어갔고
메트의 관계자들은 탈리아비니를 방문하여 출연 교섭을 하였고
1947년 1월 10일 라 보엠의 로돌포 역으로 메트 무대에 데뷔하였다

유명한 음악비평가 어빙 콜로딘(Irving Kolodin)
메트 무대에서 로돌포 역을 노래한 모든 테너들 중에서
(메트 제일의 로돌포로 사랑받은 유시 비외를링까지 포함하여) 
탈리아비니 가 가정 완벽한 로돌포라고 격찬했다

탈리아비니는 메트에서의 첫 시즌 동안
세비야의 이발사 알마비바 백작
라 트라비아타 알프레도
람메르무어 루치아 에드가르
리골레토만토바 공작 등의 역을 노래했으며
이후 아홉 시즌 동안 메트에 출연하여
9개의 역을 모두 95회 노래했다

주요 레퍼토리는
도니제티, 베르디, 푸치니 오페라 의 리릭 테너 역이었는데
가장 중요한 역이자 가장 많이 노래한 역은
역시 로돌포 역이었고
그 다음으로 많이 노래한 역은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의 에드가르도 역이었다

그러나 메트에서 높은 인기를 누렸음에도
탈리아비니는 1955/56년 시즌을 끝으로
일곱 시즌 동안이나 메트 무대를 떠나 있었는데
아마도 비슷한 시기에 메트를 떠난 많은 스타들 처럼
메트의 독재적인 총감독 루돌프 빙(Sir Rudolf Bing)
마찰을 빚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1961/62년 시즌 다시 메트 무대에 전격 컴백하여
로돌포 역과 네모리노 역을 노래하여 메트의 청중을 열광시켰다

1960년대 들어
자신의 목소리가 지닌 힘과 아름다움에 쇠퇴가 찾아오고 있음을
느낀 탈리아비니는 이후 계속 오페라 공연 횟수를 줄여가다
1966년 마침내 오페라 무대에서의 은퇴를 선언하고
오페라 가수로서의 28년간의 커리어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오페라 무대에서 은퇴한 뒤에도
콘서트 무대에서는 계속 활약하다
1981년의 고별 콘서트를 끝으로 완전히 은퇴했다



이후 로마에 거주하며 후진 양성에 전념했지만
말년에 이르러 오랜 동안의 흡연 때문에 발생한
후두암으로 투병하다
1995년 1월 29일 로마의 자택에서
향년 82세를 일기로 조용히 타계했다

탈리아비니는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전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최초의 성악가일 것이다
그러나 오페라 가수로써 알려진 것이 아니라
영화배우로써 알려졌습니다

헐리우드 스타 조운 폰테인(Joan Fontaine)
영화 물망초에 출연하여 OST 나를 잊지 마세요 를 
전 세계적으로 히트하며
오페라를 모르는 일반 대중에게까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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