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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가

한국 환상곡 / 안익태

 

 

한국 환상곡
Symphonic Fantagia KOREA 

 


제 1 부 : 개국과 평화로운 우리 조국
제 2 부 : 일제의 압박과 백성들의 암울함
제 3 부 : 조국의 광복
제 4 부 : 한국전쟁과 조국의 영광

 

한국 환상곡 (Symphonic Fantasia Korea)은
우리 민족의 영광과 수난을 함께 묘사한 대서사시로
크게 네부분으로 나뉘어 진다

 

 

첫번째는 한국의 전통음악을 토대로 한 서정적인 부분으로
서두에 천지를 진동하는 듯한 전 관현악의 울림으로
장엄한 고조선의 개국을 알리고
이어서 아름다운 조국 강산을 묘사하는 서정적인 멜로디가 흐르고
거기에 우리의 민요가락이 여러가지 악기소리로 나타나
평화를 사랑하는 순박한 한민족의 심성을 묘사한다

때때로 타령조의 멜로디가 섞이면서
농민들의 춤사위를 표현하기도 한다

 


두번째는 일제의 압제하에서 신음하는
조국의 암울한 모습을 묘사한 부분으로
이토록 평화롭던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을
이 강산을 침노한 일제에게 짓밟혀
곡상은 무겁고 침통하게 흐르고 만다

평화롭던 민족의 가락은 끊어지고
일제에 항거하는 투쟁은 계속되나
수많은 애국 지사들의 죽음으로 진혼의 슬픔이 계속된다

 


세번째는 드디어 광복의 기쁨을 맞는 애국가의 합창부분으로
이 부분에서 안익태선생은 자신이 작곡한 애국가를
1절부터 4절까지합창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애국가가 조를 달리하며 소리 높이 울려 퍼질때
말할수 없는 감격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네번째는 6.25 동란으로 인한
처절한 동족간의 싸움을 묘사한 부분으로
한반도는 6.25 동란으로 인한 전화에 휩싸이게 되고
선율은 또다시 슬픔으로 바뀐다

 

전통 아악의 정취가 울려 퍼진 뒤에 드디어
무궁화 삼천리 나의 사랑아
영광의 태극기 길이 빛나리
금수강산 화려한 나의 사랑아 하고 외치면서
만세 소리와 함께 한국환상곡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한국환상곡은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착상하기 시작했고
필라델피아 음악학교를 졸업할 때 (1932년)

1부가 완성되었지만 연주되지 못했고
독일로 건너가 (1936년) 애국가를 작곡한 후
후반부에 애국가를 합창으로 삽입하여
에이레의 더블린 에서 비로소 초연(1938년) 되었다

 

한국환상곡에는
스승인 리하르트 쉬트라우스 의 조언이 많이 포함되어있고
해방까지는 합창부분까지만 연주되어 오다가
 6.25 동란이후 제4부(전쟁부분)를 추가시켜

현재의 곡으로 완성시킨 것이다

 


한 많은 조국의 역사와 우리 민족의 슬기로운 얼
그리고 정의와 자유를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한민족의 힘찬 의지를 담아 작곡한
한국환상곡은 조국에 바치는 사랑과 충성의 표증이다

 

애국가를 자신의 코리아환상곡의 후반부에 삽입하여
외국에서의 연주회 때에도 반드시 우리말로 부르게 하였다

 


1938년  더블린 에서 초연
1939년 로마교향악단
               베오그나드 라디오 교향악단
               불가리아 필하모니
1940년 부다페스트 필하모니
1941년 쥬리히와 하노버
1942년 베를린 필하모니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필하모니
1943년  베를린 필하모니

               마드리드 심포니
1944년 로마와 파리 등에서

               총 15회에 걸쳐 한국환상곡을 무대에 올린바 있다

 

 

안익태  (安益泰)
(1906-1965)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는
1906년 12월 5일 여관을 경영하는
중류가정의 셋째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선천적으로 음악적 재능을 지녔기에
6세 때에 동네의 예배당에서 흘러나오는 찬송가에 이끌리어
집안 몰래 교회에 나가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고
특히 교회에서 풍금(올겐)을 만져 볼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
인생을 결정짓게 된 중요한 동기중의 하나였다

 

또 하나의 동기는
큰형이 동경에서 사다준 바이올린으로 더욱 음악에 매혹되게 했어
6개월을 연습한 후에는 찬송가를 연주할수 있게까지 되었다

 


1914년 평양 종로보통학교에 입학하자
학교 취주악대에서 부는 트럼펫 소리에 매료되어
아버지를 졸라 트럼펫을 손에 넣게 되었고
그 후 학예회 때마다 으례히 한 손에는 바이올린을
또 한 손에는 트럼펫을 들고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다

 

1918년 숭실중학에 입학하자 교장은
그의 음악적 재능에 탄복한 나머지
곧 바로 관현악단에 입단 시켰고
2학년이 되어서는 음악부장이 되어
매주 한번씩은 집에 있는 축음기를 학교로 가져가
음악감상회를 열면서 더욱 뜨거워졌다

 

숭실학교에 다니면서
친일교사를 배척하는 주동자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정학처분을 받게되고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나서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왜경의 쫓김을 받게되었고
결국 당시 숭실학교 교장이었던 마우리 박사의 도움으로
평양기독병원에 입원하여 일단 위기를 넘긴 후
마우리 박사의 주선으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유학 길에 오르게 되었다

 


지휘자로서의 음악수업은
동경국립음악대학에서 첼로를 전공함으로서 시작되었고
첼로 수업은 미국의 신시내티 음악대학에서도 계속 되었다


그러나 1932년 신시내티에서 가진 첼로 연주회를 끝으로
세계적인 첼리스트가 되는데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한 나머지
지휘와 작곡공부를 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1932년 필라델피아 음대로 옮긴 다음
관현악 전반에 걸쳐 연구하게 되었고
특히 레오폴드 스토코브스키 가 이끄는
필라델피아 교향악단 의 공연은 산 교육이 되었다

 

1935년 커디스음악원으로 옮긴 다음
세계적인 지휘자 겸 작곡가인 프리츠ㆍ라이너 로부터
작곡과 지휘를 본격적으로 사사 받았으며
스토코브스키 의 권유로
필라델피아 관현악단 의 연습단원으로 입단
지휘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하면서 부터다

 


1936년  유럽으로 건너가 뷔엔나에서
지휘자인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문하에 들어가
베토벤의 교향곡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하였고
헝가리로 건너가 리스트 음악원에 특별연구생으로 입교하여
졸탄 코다이 로부터 작곡을 배웠고
졸탄 코다이 의 민족음악에서 영향을 받아
작품 속에서  한국적 분위기가 풍겨 나온다

 

에르네스트 도나니 교수로 부터 지휘법을 배우기에
세계 유명 교향악단 을 객원 지휘했으며
마요르카 교향악단 의 상임지휘자로 있을수 있었던 것은
세계 최고의 지휘자들인
레오폴드 스토코브스키
프리츠 라이너
바인가르트너
코다이
도나니
리하르트 쉬트라우스
같은 훌률한 스승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 목록
1) 악보가 남아있는 작품들
<한국의 생활> 모음곡. 성악곡 (1934-1935)
1번 : 이팔청춘, 2번 : 아리랑고개
<애국가> (1935)
<강천성악>. 교향시 (1936?)
<한국환상곡>. 환상적 교향곡 (1936-1937)
<논개>. 교향시 (1962)
<애국지사추도곡>. 관현악곡 (1962)
<흰 백합화>. 성악곡 및 현악독주곡 (1962?)
<한국무곡>. 관현악곡 (1963)

 

2) 악보가 남아있지 않은 작품들
<한국의 생활> 모음곡. 성악곡 (1934-1935?)
3번 : 전원, 4번 : 백합화
<마요르카>. 교향시 (1948)
<퍼르멘토르의 로 피>. 교향시 (1951)
<시와 조선>. 교향곡
<방아타령>
<고종의 승하>
<아악>

 

한국 환상곡(Symphonic Fantagia KOREA)

           -  작곡 안익태
제 1 부 : 개국과 평화로운 우리 조국 

제 2 부 : 일제의 압박과 백성들의 암울함

제 3 부 : 조국의 광복

제 4 부 : 한국전쟁과 조국의 영광

 


 


한국 환상곡

         - 정명훈 지휘

전곡 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