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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권
미사의 노래
미사의 노래를 만든 이인권은
6.25 전쟁 중 전방의 한 위문공연장에서
부인과 함께 공연 도중
포탄이 날아와 부인은 그 자리서 숨지고
자신은 중상을 입는 끔찍한 사고를 당한후
아내를 그리워하며 만든 노래라고 합니다
미사의 노래속에 나오는 니콜라이 종소리는
바로 서울 정동 동방 정교회 니콜라스 성당의 종소리라고 합니다
19세기 말엽 대한제국에는
약 90명의 러시아 제국 군인들과 30명의 민간인들이 들어와 있었으며
이들은 러시아 공사관에 모여 사제 없이 주일과 축일에
기도와 찬양으로 성사를 대신하며 생활을 하였으나
정교회 사제가 없어 태어나는 자녀들에게 세례를 베풀수가 없었고
성체 성혈 성사로써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받을수가 없었으며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를수가 없었기에
당시 볼랴놉스키 주한 러시아 공사는 1897년 1월 3일
본국에 대한제국에서 사목할 정교회 사제의 파송을 요청하였습니다
1897년 7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던 러시아 정교회 주교회의가
한국 선교를 결정함에 따라 소규모 선교회가 조직되어
1897년 안에 한국에 입국할 예정이었으나
당시 한국을 사이에 두고 열강들이 치열하게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던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결국 포기하고 귀국해버렸습니다
1900년 2월 17일 제 2차 선교회가 조직되었으며
대수도사제 흐리산프 솃콥스키 신부와
봉독자 이오나 렙첸코가 파송되었지만
한성에는 성찬예배를 집전할 정교회 성당이 없어서
독실한 정교회 신도였던 주한 러시아 공사가 제공한 관저를
임시 성당으로 꾸미고
1900년 2월 17일 성 테오도로스 대순교자의 축일에
성수로 축성되고 한국에서의 첫 성찬예배가 봉헌되었다고 합니다
초대 사제인 흐리산프 신부는
정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모아 교리학습을 시작하였고
한국어로 된 교리서와 전례서가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지만
러시아어를 직접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어려워
중국 정교회 측에 요청하여 중국어 정교회 서적을 입수하고
러시아어와 한국어에 능통한 사람의 도움을 받아 한국어 예식서와
니케아 -콘스탄티노플리스 신신경 십계명을 번역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신도수는 점점 증가하여
공사관에 마련된 임시 성당은 신도를 수용하기에 협소하여
1903년 4월 17일 고종 황제로 부터
정동에 땅을 하사받고 그곳에 성당을 건립하였습니다
정동 시절 성 니콜라스 성당의 모습 (1903 ~1967)
정동 성 니콜라이 성당은 1967년 현재의 마포 아현동으로
이전하기까지 한국에서의 정교회 활동의 중심이 되어왔습니다
대한제국 말기인 19세기에는
적지않은 한국인들이 궁핍과 기아를 피해 국경을 넘어
러시아의 일연해주 일대에 정착하여 체류하기 시작하였는데
러시아는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러시아 정교회에서 세례를 받도록 하였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자
일본은 러시아인들에게 강제 출국 명령을 내여 한국에서 추방하였습니다
1906년 러시아 정교회 대수도사제 파벨 이바놉스키 신부에 의해
한국의 선교사업을 재시작 되었습니다
1906년 부터 1912년 까지 한국에 머물며
러일 전쟁당시 전몰한 러시아군 장병의 넋을 위로하려고
묘비 건립을 추진하려 하였지만 일본의 방해로 무산된바 있습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가 공산화되면서 선교회가 폐쇄되어
러시아 정교회에서도 한국 교회를 더 이상 지원할수 없게 되므로
1922년 2월 26일 한국 정교회는 일본 정교회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정교회 교리 수업은 일본의 감시하에서 어렵게 진행되었으며
1912년 일본 정교회의 도쿄 대주교 세르기로부터
한국인으로서는 제1기생 교습생 가운데 첫 한국인 처음으로
강탁(요한) 신부가 사제 신품을 받았습니다
서울 아현동 동방 정교회
1945년 일본이 패망함에 따라
한국 정교회는 일본 정교회로부터 독립되었지만
1950년 6.25 동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한국의 유일한 정교회 사제였던 김의한(알렉세이) 신부가
북한에 강제로 납치되었고
서울 정교회 성당은 전쟁 중에 떨어진 포탄에 의해 크게 파손되고
얼마 안 되던 신도들마저 뿔뿔이 흩어져 피난을 가서
사실상 한국정교회는 와해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한국 전쟁에 참여한 그리스군에 종군하던
대사제 안드레아스 칼키오풀로스 신부의 도움을 받아 성당은 재건하였고
1954년 한국을 떠나기에 앞서 한국인 신도 가운데
새로운 사제 문이춘(보리스) 신부가 서품받게 하였습니다
사제가 된 문이춘 신부는 한국 정부가 국가재산으로 편입시키려 했던
교회 재산을 오랫동안 소송을 벌여 승소해 되찾았으며
정동에 있던 성당을 매각하고 마포구 아현동에 새로운 성당을 세워
성 니콜라스 성당이라 명명하였습니다
당시 한국의 정교회는
교회 조직상 어느 곳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기에
1956년 심사숙고 끝에 성탄절에 소집된 신도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콘스탄타노플리스 총대주교청 산하로 들어갈것을 결의하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청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한국의 정교회를 자신들의 담당 아래 두었습니다
그리스 에게해 에기나섬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 외대에서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하다
이후 한국의 정교회는 오랫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청의 산하 기관인
뉴질랜드 관구에 속해 있었으며
2004년 6월 20일 한국 교구가 관구로 승격되면서 되면서
독자적인 자치권을 갖게 된것입니다
1982년 5월에는 한국에 처음으로 정교회 신학원이 설립되었으며
2008년 7월 20일 서울 아현동의 성 니콜라스 대성당에서
그리스 출신의 암브로시오스 아리스토텔레스 조그라포스구장 주교의
착좌식을 가졌습니다
미사의 노래
- 이인권
(대사)
추억은 이다지 그립고 아쉬운 것인가요
무수한 세월들이 흘러갔건만
성당의 저녁 종소리 은은하게 들리어 오면
가고 없는 그 님을 아직도 못 잊어
사랑의 십자가를 만지면서
언제나 이 노래를 부른다지요
당신이 주신 선물 가슴에 안고서
달도 없고 별도 없는 어둠을 걸어가오
저 멀리 니코라이 종소리 처량한데
부엉새 우지마라 가슴 아프다
두 손목 마주 잡고 헤어지던 앞뜰엔
지금도 피었구나 향기 높은 다리아
찬 서리 모진 바람 꽃잎에 부지마라
영광의 오솔길에 뿌려보련다
가슴에 꽂아 주던 카네이숀 꽃잎도
지금은 시들어도 추억만은 새로워
당신의 십자가를 가슴에 껴안고서
오늘도 불러 보는 미사의 노래
미사의 노래
- 하모니카 연주
아리스토텔리스 암브로시오스 조그라포스 대주교
미사의노래
- 조항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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