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수 (南仁樹)
남인수는 1918년 10월 18일 경남 진주 태어났다.
남인수의 어린시절에 대한 얘기는 여러 가지 추측이 많다
최씨 문중에서 태어난 남인수(아명- 최창수(崔昌洙) 는
어려서 부친을 잃고 어머니 (장하방)가
강씨 문중으로 재가(再嫁)를 하게 되어
이름을 강문수(姜文秀)로 바꾸었다는 말도 있고
어렸을 적 너무 가난하여 강씨 문중에 양자로 들어갔다는 말도 있다
봉래 보통학교 출신이라고 알려져있고
가난과 구박에 못이겨
일본으로 무작정 가게 되어 전구공장에 취직하였고
이곳 저곳 떠도는 소년 노동자 생활을 하게 되었다
10대 후반에는 제철공장에 취업하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동해상업학교를 졸업했다는 말도 있는데 확실하지 않다
1939년 4월 7일 김은하와 결혼하여
2남 2녀(맏딸- 명자/ 둘째딸- 명주/ 아들- 대우/ 아들- 대익)를 두었고
1957년 경부터 불거져 나온 이난영과의 스켄들은 후에
정식적으로 이난영과 재혼을 했는지 여부는 아직 밝혀진바 없으나
1958년 말 부인 김은하와 이혼함으로 재혼을 한 것으로 보인다
1958년 대한 가수협회의 초대회장을 역임하였고
1960년 전국 공연단체 연합회 회장을 거쳐
1961년 12월에는 한국연예협회 부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62년 6월 16일 (당 44세) 지병인 폐결핵 으로 타계하였다
그리고 사상 최초 연예협회장으로 조계사에서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노래실력이 뛰어나 여러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1935년 어느날 서울로 상경하여
당시 작사가 박영호가 있던 씨에론레코드사에서 테스트를 받았고
실력을 인정한 박영호가 작곡가 박시춘에게 소개 시켜
여름 눈물의 해협이라는 곡을 취입하여 레코드 가수로 데뷔한다
1936년 말 강사랑의 후원으로 오케 레코드에 입사하여
예명을 남인수(南仁樹)로 하여
오케이 레코드 전속으로 범벅서울 돈도 싫소 사랑도 싫소 를 취입
본격적인 가수생활을 시작했다
일제의 만행이 극에 달할 무렵
어쩔수 없이 일제의 강요에 의해 혈서지원 그대와 나 등의
군국가요를 불렀다 하여 친일가요인이라 오명을 쓰기도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3.8선이 갈라지자
1948년 당시 고려레코드에서 분단의 아픔을 노래한
가거라 삼팔선 을 음반으로 발표하였다
이 무렵 작곡가 이봉룡 등과 같이 아세아 레코드를 설립하여
그 당시 현인등이 소속되어 있던 럭키레코드사와 경쟁
가거라 삼팔선 과 같은 주제를 담고
1949년 통일을 염원하는 달도하나 해도하나 를 불렀다
1950년 6 25전쟁때 국방부 정훈국 선전과 직속 문예중대 제2소대에
문관으로 종군하여 위문공연을 다녔고
1951년 백인엽(白仁燁)장군이 이끄는 제주도 모슬포의 제1훈련장에 입대하여
1년가까이 제주도에서 근무 하였다
1953년 휴전 후 대구의 오리엔트 레코드사에서 향수 청춘무성 등을 취입하였고
1954년 유니버샬에서 이별의 부산정거장 을 발표하여 크게 힛트하고
청춘고백 고향의 그림자 고향은 내사랑 기다리겠어요 등을 취입했다
지구레코드의 전신격인 빅토리 레코드사에서 추억의 소야곡 을 취입
작곡가 백영호를 전국에 알렸으며
오아시스로 전속하여 작곡가 이재호와 만나
한국가요의 3대 명곡 이라고 일컬어지는 산유화
그리고 제2의 이별의 부산정거장이라고 일컬어 지는 무정열차
세미클래식한 작별 등을 취입하여 힛트시켰다
1950년대 말에는 킹스타레코드 사에서
라화랑의 곡 무너진 사랑탑 울리는 경부선 한많은 내청춘 등이있다
1960년 이후 타계하기 전까지의 마지막 취입한 곡들을 보면
불효자는 떠납니다
4.19의거 희생된 학생들을 추모하는 사월의 깃발
병상에서 취입했다고 전해지는 눈감아 드리오리 등이 있으며
그외 그가 남긴 힛트곡은 수 없이 많다
1980년 가수 신해성을 주축으로 가수 20여명이
예도 매미회(남인수 기념사업회의 전신) 를 결성하고
남인수 노래비 건립 추진등 적극적인 추모 활동을 벌려
1885년 신해성은 아 그 이름 남인수 취입하고
1987년 4월 5일 경기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 밤나무골 유원지에
애수의 소야곡 노래비를 건립하였다
현재 이 노래비는 1998년 제 8회 남인수 가요제를 기념으로
서울 드림랜드 내로 이전하여 여기에 위치하고 있다
1991년 6월 26일 부터
제1회 남인수 가요제를 시작으로 매년 개최하고 있으며
2001년 6월 26일 남인수 선생 타계 39주년 기념으로
진주시 진양호 내에 남인수 선생의 동상을 제막하였다
현재 진주시 하촌동 195번지에 남인수 선생의 생가가 있고
진주시 장재동 산 49번지에 강씨문중 소유인 남인수 선생의 묘소가 있다
추억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6.25 전쟁으로 온 나라의 사람들이 남으로 남으로 내려와부산이라는 조그만 항구 도시에 모두 모여 살게 되었다
그렇게 그들은 몇 년을 살았다
그렇게 몇 년의 세월이 흐르고 전쟁이 끝났다
부산 정거장 에서는 하루에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부모님을 찾아 연인을 찾아
아내를 찾아 자식을 찾아 친구를 찾아 기차를 탔고
그들을 배웅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부산 정거장에 가득가득 찼다
부산 정거장은 그렇게 기나긴 시간 동안 수많은 사연들로
울렁울렁 넘쳐나는 눈물과 기대 원망과 미안함
과거와 현재가 오버랩 되는
50년 대의 가장 극적인 장소였던 것이다
여기에 한 이야기가 있다
그 당시 그들 모두의 얘기였을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부산까지 피난을 오게 된 한 남자
그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경상도 아가씨
전쟁통의 시간을 훌쩍 지나가게 만들었을 그들의 로맨스
그리고 전쟁이 끝나 고민고민 끝에
다시 아내를 찾아 기차를 타는 남자
그를 배웅하는 여자.........
그 당시 부산 정거장에는
매일 매일 수천 이상의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이별을 했을까 ?
그 때 작곡가 박시춘씨도 매일 부산 정거장에 나와
남녀의 이별 수 많은 이별 사연들을
뜨거운 눈시울로 바라보고 있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노래가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노래의 반주는
기차가 서서히 떠나가며 내는
기적 소리 바퀴 소리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별의 부산정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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